선원과 보감

‘선원璿源’은 아름다운 옥의 근원이라는 말로, 국왕의 계보를 뜻한다. ‘보감寶鑑’은 후세에 본보기가 될 만한 일이나 그것을 적은 책으로, 국왕의 선정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선원과 보감은 국왕과 왕실 구성원에게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었다.


태종은 왕실의 계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시조 이한李翰부터 자신까지의 직계만을 『선원록』에 수록하고, 종친과 딸 및 서얼은 별도로 정리하여 왕위계승의 분쟁을 차단하였다. 숙종은 1680년(숙종 6) 왕실의 계보를 정리하여 『선원록』으로 편찬하였다. 여기에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국왕의 친인척에 관한 인적사항을 조사하여 함께 기록하였다. 이후 조선왕실은 국왕이 바뀌면 그 변화를 정리하여 지속적으로 『선원록』을 편찬하였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의궤로 남기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보감을 편찬하려는 기획은 세종 대부터 있었다. 1457년(세조 3) 세조의 명으로 태조·태종·세종·문종의 4조 보감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세조 이후에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지 못하였다. 1684년(숙종 10) 문신 이단하李端夏가 그 아버지 이식李植의 유업을 이어 선조의 보감인 『선묘보감』을 편찬하였다. 영조는 숙종의 보감을 편찬하게 하여 1730년(영조 6)『숙묘보감』을 완성하였다. 정조는 영조의 보감을 포함하여 보감이 정리되지 못한 열두 조종의 보감을 총정리하여 1782년(정조 6) 『국조보감』을 편찬하였다. 이후 헌종과 순종 때에 영조 이후 국왕의 보감을 정리하여 『국조보감』에 추록하였다.


조선시대 국왕의 계보와 치적의 정리는 국가적 사업이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위기였으며 왕실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에 숙종은 왕실의 계보와 열성의 치적을 정리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법전과 의례

조선시대 법전法典은 최초 성문 법전인 『경제육전』부터 최후의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인 체제는 거의 유사하다. 먼저 대전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전마다 여러 항목으로 구성되었으며, 다시 그 밑에 세부 사항을 담은 관련 조문들이 나열되었다. 육전은 이吏·호戶·예禮·병兵·형刑·공工으로 권력 구조의 분야별 근간을 제시하는데, 각 전에 속한 여러 조문들과 상호 연결시키는 매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항목이다. 따라서 항목은 위로 각 전이 지닌 분야별 특성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장치이면서 아래로 각 조문의 범위를 제어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선 태조 이래 의례儀禮를 제정하고 수정·보완하는 중심 기능을 수행한 것은 예조였다. 1402년(태종 2)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립하여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를 기본으로 의례의 개정작업을 진행하였다. 세종 대에는 집현전에서 당시까지 행해지던 조선 고제古制와 당송의 구례舊禮 및 제도를 첨삭하여 『세종실록』 「오례五禮」로 정리하였다. 이것은 세종 대에 편찬할 계획이었으나, 결국 세종 사후 실록 편찬 과정에서 부록으로 정리하였다.


『세종실록』 「오례」를 바탕으로 세조 대에 다시 오례의 정리 작업이 진행되었다. 1456년(세조 2) 5월 세조는 하위지河緯地를 통해 집현전에 나아가 『오례의주五禮儀注』를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육신 사건과 집현전의 혁파로 이 작업이 중단되었다가, 1474년(성종 5) 강희맹姜希孟·정척鄭陟 등에 의해 『국조오례의』로 집대성되었다.


이후 역사적 변화를 수용하여 1744년(영조 20)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전체적으로 길례·가례·군례·흉례에 대한 내용을 보충하고, 이후 1751년(영조 27)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에서 다시 길례와 가례에 대한 내용을 크게 강화하였다. 1758년(영조 34)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서는 상례를 시의時宜에 맞게 정비하고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하였고, 1788년(정조 12)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은 이들을 종합하여 보다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집대성하였다. 이는 1788년 『춘관통고春官通考』와 1898년(광무 2) 『대한예전大韓禮典』의 편찬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관방과 수성

조선의 방위는 임진왜란과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기존의 관방론關防論에 대한 반성의 일환으로 전 국토 방위체제에서 도성 중심의 방위체제로 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의 군제軍制도 변화하였는데, 중앙군제는 훈련도감과 오군영의 설치, 지방군제는 속오군의 편성과 영장제 실시가 그 골자였다. 도성 외곽은 연해·연변 지역과 평지 읍성 중심의 소규모 방어 체계를 보완하여 수성守城하기 위한 산성의 축조가 전반적으로 확대되었다. 또한 한양 도성 방위체제를 새롭게 편성하여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 도성의 삼군영이 방어를 담당하게 하고, 총융청이 북한산성을, 수어청守禦廳이 남한산성을 담당하는 이원적인 체제로 운영하였다. 지방 역시 수도 방어를 위한 정비와 보완을 목적으로 외방산성을 경영하였다. 먼저 한양 도성은 북쪽으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하나의 단위로 묶었다. 그리고 도성 주변의 요해처 강화를 도모하면서 북쪽은 개성읍성과 대흥산성, 서쪽으로는 통진 문수산성, 강화부성 돈대 및 정족산성, 남쪽으로는 독성산성, 동쪽으로는 광주의 남한산성에 대한 관방 정비 작업이 진행되었다.


한편 숙종 초기 청나라 정세의 불안정으로 그들이 자신들의 군사적 근거지였던 영고탑寧古塔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청의 영고탑 회귀설이 돌면서 조선의 경내를 침략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었다. 또한, 1712년(숙종 38) 청과 조선의 백두산 정계定界는 양국 사이 변경 지역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인식은 이후 제작된 지도에서 영고탑을 중심으로 하는 청군의 퇴로를 표기하는 한편, 만주 지역에 대한 고토 의식과 국경에 대한 고조된 관심 속에 함경도 북부 지형 윤곽을 현실적으로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영조는 왕권의 강화에 주력하는 한편 국방의 기틀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각종 화포의 개량과 화차 등 병기의 개발 및 연안 순찰을 위한 각종 병선의 수리와 건조에 힘썼다. 또한 군인들의 조총 훈련을 장려하기 위한 일환으로 『속대전』에 입법 규정까지 두었다. 한편 수어청을 설치하여 총포의 제작을 명하고 진보의 토성을 개축하는 등 국방에 힘썼다. 행정 및 전략적 목적으로 팔도군현지도를 제작하여 비변사에 비치하였고, 지도에는 국방 요충지와 병참선 등을 상세히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