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백성의 실정이 임금에게 전달되게 하는 것[下情上達]’은 이상적인 유학 군주가 실천해야 할 일이다. 유학적 입장에서 군주는 하늘이 내고, 하늘은 곧 백성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뜻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군주와 관료가, 군주와 일반 백성이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조선에서는 1401년(태종 1) 신문고 설치를 논의하고 다음 해에 시행에 옮겼고, 상언上言·격쟁擊錚도 허용하여 백성의 소리를 듣는 창을 다양화하였다. 특히 형刑으로 자신이 죽을 지경에 있는 이들의 사연과 가족 관계를 밝히고 신분을 밝히는 등의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 후기에는 자손이 아버지와 조부를, 처가 남편을, 아우가 형을, 노비가 상전을 위해 상언·격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접수된 상언·격쟁은 승정원에서 국왕에게 보고하고, 국왕은 그 내용에 따라 관련 부서에 보내어 5일 이내로 살펴서 답변하게 하였다. 상언·격쟁의 사안이 관련 부서의 조사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중요한 사안일 때는 조사를 바탕으로 대신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 처분을 내렸다.
상언과 격쟁은 백성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국왕과 백성의 소통인 반면, 국왕이 백성의 실정을 파악하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 주는 방식의 소통도 있었다. 암행어사 파견이 그것이다. 국왕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목적은 첫째, 지방관이 국왕을 대신해서 백성을 잘 다스리고 있는 지를 살피는 것이고, 둘째, 지방민의 질고疾苦는 무엇인지를 비밀리에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암행어사의 파견은 명종 때부터 연대기 자료에 등장하는데, 조선 후기에 더욱 활발하였다.
조선에서는 1401년(태종 1) 신문고 설치를 논의하고 다음 해에 시행에 옮겼고, 상언上言·격쟁擊錚도 허용하여 백성의 소리를 듣는 창을 다양화하였다. 특히 형刑으로 자신이 죽을 지경에 있는 이들의 사연과 가족 관계를 밝히고 신분을 밝히는 등의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조선 후기에는 자손이 아버지와 조부를, 처가 남편을, 아우가 형을, 노비가 상전을 위해 상언·격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접수된 상언·격쟁은 승정원에서 국왕에게 보고하고, 국왕은 그 내용에 따라 관련 부서에 보내어 5일 이내로 살펴서 답변하게 하였다. 상언·격쟁의 사안이 관련 부서의 조사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중요한 사안일 때는 조사를 바탕으로 대신의 의견을 수렴하여 최종 처분을 내렸다.
상언과 격쟁은 백성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국왕과 백성의 소통인 반면, 국왕이 백성의 실정을 파악하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 주는 방식의 소통도 있었다. 암행어사 파견이 그것이다. 국왕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목적은 첫째, 지방관이 국왕을 대신해서 백성을 잘 다스리고 있는 지를 살피는 것이고, 둘째, 지방민의 질고疾苦는 무엇인지를 비밀리에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암행어사의 파견은 명종 때부터 연대기 자료에 등장하는데, 조선 후기에 더욱 활발하였다.
권농
숙종이 즉위한 1674년에 안주에 살던 유민流民 임오금林吾金이 “먹을 곡식이 없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아내에게 말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숙종은 즉시 비망기를 내려 각 지방관에게 놀란 마음과 근심을 전하며 백성을 돌볼 것을 지시하였다. 이 비망기에서 숙종은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라의 근원인 백성과 먹거리가 어느 때보다 위태하였던 시기가 숙종 연간이었다. ‘을병대기근’이라 불리는 1695년(숙종 21)과 1696년(숙종 22)의 기근은 1699년(숙종 25)까지 지속되었으며 그 결과는 전쟁보다 더 참혹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숙종은 농경과 기우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노력은 영조와 정조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예기』「월령」편에는 첫 달에 천자가 거행해야 할 일로 기곡祈穀과 친경親耕을 제시하였다. 왕실에서는 한 해의 농사를 하늘에 비는 기곡과 천자가 밭에 나가 직접 밭갈이를 하는 친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선 초기부터 알았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전자는 천자의 의식이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태평성대太平盛代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연이은 흉년으로 거행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현종과 숙종 연간에 연속된 흉년은 농경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고, 숙종은 원구단의 폐지 이후 사라졌던 기곡제를 사직단에서 부활시켰다. 이 전통은 영조와 정조에게도 계승되어 사직 기곡제가 ‘대사大祀’로 정례화되었다. 영조는 광해군 이후 끊겼던 친경례를 부활하여 재임 기간 중 네번이나 거행하였다. 아울러 정순왕후를 통해 친잠례親蠶禮도 부활시켜 농경과 길쌈을 권면하였다.
한편, 현종과 숙종 연간의 가뭄은 기우제의 정비와 더불어 국왕이 직접 기우 제단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704년(숙종 30)에 숙종은 기우제의 순서를 12단계로 정비하였다. 이는 동일한 장소에 너무 자주 거행하여 기우제가 농민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되었던 폐해를 없애고 백성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숙종은 국왕으로선 처음으로 선농단에 나아가 기우제를 직접 지냈다. 영조는 종묘, 사직, 남단 외에 북교, 우사단까지 친행 기우의 제장을 넓혔다. 이것이 탕왕湯王의 ‘이신대희以身代犧(내 몸으로써 희생을 대신하다)’를 실현하는 것이며, 백성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정仁政이었기 때문이다.
『예기』「월령」편에는 첫 달에 천자가 거행해야 할 일로 기곡祈穀과 친경親耕을 제시하였다. 왕실에서는 한 해의 농사를 하늘에 비는 기곡과 천자가 밭에 나가 직접 밭갈이를 하는 친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조선 초기부터 알았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전자는 천자의 의식이기 때문이었고, 후자는 태평성대太平盛代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연이은 흉년으로 거행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러나 현종과 숙종 연간에 연속된 흉년은 농경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켰고, 숙종은 원구단의 폐지 이후 사라졌던 기곡제를 사직단에서 부활시켰다. 이 전통은 영조와 정조에게도 계승되어 사직 기곡제가 ‘대사大祀’로 정례화되었다. 영조는 광해군 이후 끊겼던 친경례를 부활하여 재임 기간 중 네번이나 거행하였다. 아울러 정순왕후를 통해 친잠례親蠶禮도 부활시켜 농경과 길쌈을 권면하였다.
한편, 현종과 숙종 연간의 가뭄은 기우제의 정비와 더불어 국왕이 직접 기우 제단에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1704년(숙종 30)에 숙종은 기우제의 순서를 12단계로 정비하였다. 이는 동일한 장소에 너무 자주 거행하여 기우제가 농민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되었던 폐해를 없애고 백성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숙종은 국왕으로선 처음으로 선농단에 나아가 기우제를 직접 지냈다. 영조는 종묘, 사직, 남단 외에 북교, 우사단까지 친행 기우의 제장을 넓혔다. 이것이 탕왕湯王의 ‘이신대희以身代犧(내 몸으로써 희생을 대신하다)’를 실현하는 것이며, 백성의 아픔에 공감하는 인정仁政이었기 때문이다.
숭검
숭검崇儉은 국왕이 가장 경계해야 하는 덕목 중 하나였다. 1458년(세조 4) 『어제훈사』에는 사치하지 말라는 ‘물치勿侈’로, 「경계십잠儆戒十箴」과 『어제상훈』에는 검약을 숭상하라는 ‘숭검崇儉’으로 기록하였다. 이후 1764년(영조 40) 『어제조훈』에는 절약하고 검소함을 권유한다는 의미의 ‘권절검勸節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훈시의 조목에 늘 빠지지 않는 것이 숭검이었다.
영조의 숭검은 정조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정조는 우리 왕가의 가법家法이 ‘숭검崇儉’ 두 글자인데 이처럼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 사치는 날로 심해지고 이로 인해 온갖 폐단이 생겨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못마땅해하였다. 그럼에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치하는 폐단의 근원을 찾고자 고민했다. 부수찬 한광근韓光近은 하늘이 재물을 생산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사람이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절도가 없어 재물이 고갈되었으며, 재물을 소모하는 단서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사치가 가장 심각하다고 함으로써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절용節用을 손꼽았다. 절용은 저축을 넓히는 근본이며 저축을 넓히는 것은 임금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곧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어도 저축해 놓은 것이 많으면 부세를 더하지 않아도 백성을 구제할 수 있으니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의 숭검은 정조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정조는 우리 왕가의 가법家法이 ‘숭검崇儉’ 두 글자인데 이처럼 백성들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때를 당하여 사치는 날로 심해지고 이로 인해 온갖 폐단이 생겨나는 것을 부끄러워하며 못마땅해하였다. 그럼에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사치하는 폐단의 근원을 찾고자 고민했다. 부수찬 한광근韓光近은 하늘이 재물을 생산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데 사람이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절도가 없어 재물이 고갈되었으며, 재물을 소모하는 단서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사치가 가장 심각하다고 함으로써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절용節用을 손꼽았다. 절용은 저축을 넓히는 근본이며 저축을 넓히는 것은 임금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곧 백성을 위하는 것이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들어도 저축해 놓은 것이 많으면 부세를 더하지 않아도 백성을 구제할 수 있으니 나라를 위태로움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