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왕의 자기 학습

조선의 국왕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세자 시절부터 서연書筵을 통해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를 섭렵하여 국왕으로서 익혀야 할 성품과 지식을 익혔으며, 즉위한 이후에도 경연經筵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한 신하들에게 배우고 토론하면서 국왕은 제왕지학帝王之學의 요체를 깨닫고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영조는 숙종의 군사론君師論을 계승하여 세속적 군주이며 동시에 학문의 스승을 자처하였다. 영조는 학문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며 세상을 권면하는 훈서를 많이 남겼다. 이 중 영조의 자기학습과 관련된 것은 ‘심학心學’, ‘자성自省’, ‘경세警世’로 정리할 수 있다.

‘심학’에서는 『어제심감御製心鑑』을 통해 스스로 마음을 성찰하며 방심하지 않고자 하였다. 영조가 가장 강조한 것은 ‘자성’이었다. 스스로를 반성하며 후왕과 신하들을 권면하려는 영조의 통치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경세’는 당시 풍속을 개탄하며 스스로를 경계하고 세상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다.

국왕의 경연

쟁쟁한 조선의 문신들도 강학을 몹시 부담스러워했으며, 예정된 학습 범위조차 무소불통無所不通하기는 쉽지 않았다. 대개 경연이 있기 전날 서리가 강학할 곳에 찌를 붙여 놓으면 입직 강관講官은 미리 음과 뜻을 자세히 공부하였다. 성종 때 서리가 찌를 잘못 붙인 적이 있었는데, 당시 직제학이던 문신은 “책장을 펴보니 글 뜻이 마침 어려워서 잘 읽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직임을 감당하지 못함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허물이 남을 것입니다. 신의 죄를 다스려 주소서.”라고 솔직히 고백하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에는 갑자기 목이 잠긴 동료 대신 강을 하라고 명하자, 해당 강관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간신히 구두句讀만 떼고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였다. 명종 때 시문詩文에 능하기로 소문이 난 정사룡鄭士龍도 “차라리 열 번의 학질을 앓을지언정 한 차례 경연은 원치 않는다.”고 하였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숙종, 영조, 정조는 대표적인 호학好學 군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나라의 최고 권력자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사인士人의 스승 역할을 맡고자 하였다. 국왕의 경연은 어느덧 배우는 데서 가르치는 자리로 바뀌었다. 이 장에서는 영조와 정조 대를 중심으로 치열한 강론 모습을 살펴본다.

세자의 서연

고려 말기부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로서 서연書筵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조선의 세자는 성균관에 입학하지만 입학 의식만 치를 뿐 성균관에 머무르지 않고, 서연을 통해 교육을 받았다. 이 서연의 임무를 담당한 기관이 곧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이다.


서연에는 강학과 보도輔導의 기능이 있었다. 강학에서 세자의 학문은 의리를 깨달음으로써 본원을 함양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효제충신지도孝悌忠信之道’가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소학』과 『효경』을 우선적으로 가르쳤다. 그리고 경연관은 세자를 보도하기 위해 항상 세자를 시종하면서 도의를 강해야 할 책임도 있었다.


서연은 원칙적으로 세자를 교육하는 순수한 교육적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자에게 어느 정도 정치적 실권이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는 정치적인 기능을 지니기도 하였다. 서연의 여러 기능은 각 왕조의 정치 상황과 세자의 학문적 성향에 의해 좌우되었다.


중종 시절 이행李荇이 박사관이었을 적에 강연에서 세자[후일의 인종]가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묻자 이행이 말하기를 “이는 오늘날에 물을 바가 아닙니다.” 하고, 효도와 공경하는 도리를 진달하였다는 기록으로 볼 때, 세자를 곁에서 보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세자 또한 말과 행동을 매우 신중히 해야 하는 시기였음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