御製講席自歎
영조(英祖) 찬, 1770년(영조 46) ,1첩, 필사본, 32.9×18.1㎝, K4-888
이 첩은 영조가 경연의 주강晝講 자리에 참석하여 스스로 탄식한 글이다. 권말에는 “歲庚寅朱明燈夕翌日書”라고 되어 있는데 1770년(영조 46) 여름 등석일 다음 날(4월 9일)에 필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의 해당일 기사를 보면, 이 글을 지을 당시의 정황을 살필 수 있다. 영조는 사시巳時에 숭정전에 나아가 주강에 참여하였는데, 『대학』 「경일장經一章」부터 「보망장補亡章」까지 강하였고, 시강관 조종현趙宗鉉은 「경일장」부터 「명명덕장明明德章」까지, 검토관 이치중李致中은 「신민장新民章」부터 「보망장」까지 강하였으며 특진관 서명응徐命膺이 글의 뜻을 개진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영조는 팔순이 다 되어 가는 77세에도 『소학』과 『대학』을 곱씹으며 암송한다. 그러면서 갑자기 부끄러움이 훅 밀려오는 것을 스스로 개탄하고 있다.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백 번을 넘게 읽어도 여전히 ‘글은 글이고 나는 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77세의 늙은 왕이 신하들과 입문서격인 『소학』과 『대학』을 함께 공부하는 그 모습 자체로, 당대의 관료는 물론 후대 왕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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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는 자리에서 스스로 탄식함. 왕이 짓다.」
팔순이 다 된 늙은이가 아, 다시 정사를 돌보고 다시 강을 하게 되니, 단지 암송할 뿐이다. 『소학』은 「제사題辭」를, 『대학』은 「경일장」만 하고 그쳤는데, 그 뒤에는 누워서 혼자 암송할 뿐이다. 처음에는 구절마다 묻고 암송하였는데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고, 강한 지도 오래 되었다.
『대학』은 전傳을 세 장 더 암송하고 그다음 「보망장」을 암송하였고, 『소학』은 「입교편」까지 암송하였다. 그렇지만 오늘은 『대학』을 암송하고, 내일은 『소학』을 암송하여 한 바퀴 돌면 다시 시작하고 있다. 이렇게 반복해 암송하는 것이 비록 이리하면서 소일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듣는 자는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조용히 생각해 보니 나도 모르게 겸연쩍어졌다. 오늘 갑자기 옛일이 떠오르는데, 고 금평도위(錦平都尉, 박필성)는 매일 아침 「대학서문」 1편을 암송하고, 고 민 봉조하(閔奉朝賀, 민진원)는 세수한 뒤 이른 아침에 또한 「주서朱書」를 암송한다고 예전에 들었다. 지금 나 역시 이와 같이 하니, 이를 생각하고는 겸연쩍은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전傳」의 「편수篇首」는 처음에는 남겨 놓았으나, 지금은 이를 암송하고 있다. 그 가운데 ‘익숙히 읽고 자세히 음미하면 오래되어서는 알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에 대해, 나도 모르게 절로 서글퍼지고 절로 탄식하였다.
절로 서글퍼졌다는 것은 왜 그런가? 19세부터 지금 77세까지 ‘익숙히 읽은 것’으로는 나만한 자가 없을 텐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본받았단 말인가. 아아, 절로 서글퍼졌다는 것은 그 또한 많이 접어 준 말이다.
절로 탄식하였다는 것은 왜 그런가? 58년 동안 ‘익숙히 읽었다.’라고 하더라도, 글은 글이고 나는 나대로이다. 더구나 지금 팔순이 가까워 기력은 더욱 쇠하고 마음은 더욱 지쳐 가니, 날마다 백 번을 읽은들 무슨 ‘오래되어서는 알게 될’ 공덕이 있겠으며, 또한 무슨 ‘자세히 음미하는’ 효과가 있겠는가. 그리고 자양(紫陽 주희)의 「보망장」의 ‘하루아침에 환히 트여 꿰뚫는다.’라는 글귀는 다시 매우 낯 뜨겁게 만들어 마음속에서 감정이 북받쳤다. 대전에서 강을 마치고, 부르는 것을 받아
쓰게 하여 대략 기록한다. 경인년(1770년, 영조 46) 여름 4월 초파일 다음 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