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승정원 편, 1736년(영조 12), 3,045책, 필사본, 41.2×29.4㎝,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보 제303호
영조가 1736년(영조 12) 12월 23일 어전에서 신하들과 역사서를 강론한 대목이다. 진강의 많은 경우 왕의 거둥과 대화 내용을 기록하는 가주서假注書와 기사관記事官을 제외하고, 참찬관參贊官과 시독관侍讀官이 입시하였다. 참찬관은 경연의 정3품 관원으로 승정원의 여섯 승지와 홍문관의 부제학이 겸임하였는데, 국왕에게 강학하는 임무뿐 아니라, 학문 연구와 역사 편찬, 언론 활동 등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시독관은 경연의 정5품 관원으로 홍문관의 교리가 겸임하였으며, 국왕에게 경서를 강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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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년(1736, 영조 12) 12월 23일 신시申時」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다. 참찬관 김시혁金始, 시독관 조상명趙尙命, 가주서 남덕로南德老, 기사관 이성중李成中·임상원林象元이 나와 엎드렸다.
조상명이 『송원강목宋元綱目』 제6권을 읽었는데, ‘영종황제치평원년英宗皇帝治平元年’에서 ‘불석경각지간不惜頃刻之間’까지였다. 상이 이르렀다. “‘아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니, 조상명이 아뢰었다. “잠시의 틈도 아끼지 말고 날마다 경연을 시행하라는 것으로써 임금을 면려한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렀다. “그 뜻이 ‘촌음을 아낀다’는 것과는 다르다.” 하니, 조상명이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인종이구경사지仁宗以九經賜之’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가 나와 읽으라.” 하니, 김시혁이 ‘신종황제희령원년神宗皇帝熙寧元年’에서 ‘불가불면야不可不勉也’까지 읽었다. 김시혁이 아뢰었다. “소신이 눈이 침침하여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렀다. “주서가 나와 읽으라.” 남덕로가 ‘조개파趙槩罷’에서 ‘내이위하남부추관乃以爲河南府推官’까지 읽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시작하고 그치는 곳이 너무 많으니, 여기까지만 읽으라.” 하였다. 조상명이 아뢰었다. “이는 한기韓琦의 말입니다. 한기는 송나라의 어진 재상으로 재才와 덕德을 겸비하였으니, 당대 여러 어진 이들의 수장입니다. 한창 영종英宗이 병들어 있을 때에 양궁兩宮 사이를 잘 처리하였으니, 임수충任守忠을 쫓아버린 것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 한 가지 일입니다. 그가 일을 처리하고 변화에 응대함이 이와 같았기에 구양수歐陽脩가 ‘띠를 드리우고 홀笏을 정돈한 채 목소리와 낯빛에 흔들림이 없이 천하를 태산과 같이 안정된
상태에 놓았다.’라고 칭탄하였습니다. 그 덕망과 재지才智가 위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렀다. “사서史書에 ‘그래도 임금의 병풍 뒤에 태후의 옷자락이 보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에서 한기의 기상氣像이 완연히 눈앞에 있음을 상상할 수 있다. 사관이 제대로 잘 기록하였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김시혁이 아뢰었다. “덕德이 재才보다 더 나은 이를 군자라고 하고, 재가 덕보다 더 나은 이를 소인이라고 합니다. 덕망이 근본이고 재지가 다음인데, 한기는 송대에 있어서 재와 덕을 겸비하였기에 대사大事를 담당하여 나라를 편히 하고 사직을 안정시킨 명신名臣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임금이 신하에 대하여 마땅히 재와 덕을 살펴보고서 등용해야 할 것입니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