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평
영조는 『어제상훈』에서 후왕들에게 ‘하늘을 공경함[敬天]’, ‘조종을 본받음[法祖]’, ‘친족을 도타이 함[敦親]’, ‘백성을 사랑함[愛民]’, ‘무리 짓고 편 가르는 습관을 없앰[祛黨]’, ‘검박함을 숭상함[崇儉]’, ‘정신을 가다듬음[勵精]’, ‘학문을 부지런히 함[勤學]’ 등 8조목으로 나누어 경계하였다.
그중 다섯 번째에 언급한 거당이 ‘탕평蕩平’을 의미하는 것으로, 탕평은 영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심혈을 기울인 정책이다. 경종의 뒤를 이어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색을 잘 조절하여 국정 경영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바로 애민愛民의 길이라고 여겼다. 당파로 인해 국정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백성이다. 그러므로 영조는 거당도 애민의 한 방법으로 여겨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선조 때에 사림 정치가 시작되었다. 관료들이 당파를 형성하고 당론을 내세워 조정 내에서 토론하고 조율하는 것은 당쟁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당파 간의 지나친 경쟁은 국정 운영을 저해하였다. 자신의 당색을 가진 이들이 주요 관직에 제수되게 하려는 알력으로, 분관分館이 몇 년씩 지연되거나 사관史官이 부족하게 되는 일 등이 자주 재현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조와 병조 낭청의 자천제自薦制를 폐지하였고, 사관으로 추천된 자들도 직접 불러서 시험을 보는 소시법召試法을 시행하였다. 성균관에서 유생자치기구를 주도하는 장의掌議나 재임齋任도 당색을 내세워 갈등하였으므로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중 다섯 번째에 언급한 거당이 ‘탕평蕩平’을 의미하는 것으로, 탕평은 영조가 즉위하면서부터 심혈을 기울인 정책이다. 경종의 뒤를 이어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색을 잘 조절하여 국정 경영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 바로 애민愛民의 길이라고 여겼다. 당파로 인해 국정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피해를 입는 것은 백성이다. 그러므로 영조는 거당도 애민의 한 방법으로 여겨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선조 때에 사림 정치가 시작되었다. 관료들이 당파를 형성하고 당론을 내세워 조정 내에서 토론하고 조율하는 것은 당쟁의 긍정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당파 간의 지나친 경쟁은 국정 운영을 저해하였다. 자신의 당색을 가진 이들이 주요 관직에 제수되게 하려는 알력으로, 분관分館이 몇 년씩 지연되거나 사관史官이 부족하게 되는 일 등이 자주 재현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조와 병조 낭청의 자천제自薦制를 폐지하였고, 사관으로 추천된 자들도 직접 불러서 시험을 보는 소시법召試法을 시행하였다. 성균관에서 유생자치기구를 주도하는 장의掌議나 재임齋任도 당색을 내세워 갈등하였으므로 성균관에 탕평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인재 선발
인재 선발에는 과거, 천거 등의 방법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이 주를 이루었다. 과거 제도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있어 왔으나, 국왕이 이들을 직접 선발하기보다는 시관인 지공거知貢擧가 주체가 되었다. 과거 합격자들은 국왕에게 사은하기에 앞서 자신을 뽑아 준 지공거에게 인사하면서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조선 건국 초 태종은 국왕이 인재를 선발하여 등용하는 주체가 되도록 여러 조처를 내렸다. 즉 과거의 마지막 시험인 전시殿試에 국왕이 친림하고, 합격자 순위 선정에도 관여하였다. 그리고 시관의 인원을 늘려서 좌주와 문생의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미리 차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균형 잡힌 과거 운영을 위해서 무과를 신설하여, 문과와 무과를 짝지어 시행하였다. 정기시는 식년式年인 3년마다 시행하였고, 국가의 경사스러운 날에 임의로 실시하는 비정기시(증광시, 별시, 정시 등)도 설행하였다. 태종은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온 이들을 발탁하기 위해서 중시重試까지 개설하였다. 태종이 기반을 닦은 과거는 1894년(고종 31)까지 시행되었다.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유일遺逸은 천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올 수 있었다.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가면서 과거 공부를 학문으로 여기지 않는 재야 학자들을 유일로서 등용하였다. 또한 국왕들은 성균관 관원과 유생들의 합의하에 천거를 받아 성균관 유생들을 관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유생과 관료 교육
조선에서는 어진 이를 양성하는 것 또한 관료 선발 못지않게 중요시하였다. 건국 초 태종은 성균관, 사학四學, 지방 향교를 건립하고 재원을 마련하는 데 힘을 기울였고, 세종은 각 학교의 교육제도를 정비하였다. 무엇보다 조선 국왕들의 주관심사는 성균관이었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학문을 닦아 관료로 등용되었기 때문에 국왕들은 성균관 유생을 예비 관료 집단으로 인식하였고, 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16세기의 사화士禍로 유생들이 위축되어 관학이 쇠퇴하자, 중종은 유생들의 학업을 독려하기 위해서 유생 과시를 시행하고 우등자에게 직부直赴를 하사하는 은전恩典을 자주 베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인조 대 이후로 확고해져, 절일제節日製와 황감제黃柑製라는 유생 과시가 정착되었다. 국왕들은 매달 성균관 유생을 궐로 불러들여서 전강殿講을 실시했으며, 제술 시험의 출제와 채점 등을 직접 하기도 하였다.
관료 교육은 모든 관원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예문관 등의 관원들을 대상으로 월과月課로 부과되었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집현전 학사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성종의 홍문관, 정조의 규장각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성종은 문관 관료에게 부과되는 월과 제술 이외에도 경학에 밝은 젊은 관료를 선정하여 전경문신專經文臣이라 하였다. 이들은 매달 국왕의 앞에 나와서 성균관 유생과 함께 강서 시험을 치렀다. 성종은 학문이 뛰어난 학자 관료를 선정하여 독서하게 하는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정립하고, 독서당을 두었다. 정조는 선조들의 유업을 이어 37세 이하의 엘리트 관원을 선정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 하였다. 정조는 이들에게 월과와 월강을 부과하고, 직접 시험을 치르면서 경학과 제술에 능한 관료, 자신과 더불어 세상을 구할 관료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