示菊製入場諸生
정조(正祖) 찬, 1798년(정조 22), 1장, 필사, 112.0×210.5㎝, RD00165, 보물 제1632-3호
1798년(정조 22) 정조가 국제菊製에 응시했던 성균관 유생에게 내린 별유문別諭文이다. 정조는 9월 9일 성균관 유생이 치를 국제 시제試題를 출제하였다. 그는 시제로 ‘촉을 안고 말하지 않아도 기러기가 맑게 우네[抱蜀不言 鴻鵠鏘鏘].’를 출제하고 이에 대해 율부律賦로 답안을 작성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국제에 응시한 유생 모두가 문제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백지를 제출하려 하였다. 시관으로 성균관에 갔던 승지가 국제 시험장의 상황을 보고하자, 정조는 시험장에 들어왔던 유생에게 깨우치는 글을 작성하여 성균관에 게시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 별유문이다.
정조는 별유문에서 시제를 이해하지 못한 유생의 학문 수준을 논하고, 시제의 뜻을 풀이하였다. 그는 3일의 기한을 주면서 과부科賦·근체시近體詩로 답안을 제출하라고 했다. 다음 날인 9월 10일에 별도로 재시再試를 치렀다. 정조는 재시험에 응시한 172명의 유생 중에 143명만 답안을 제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9월 11일 다시 2차 시험을 치렀다. 9월 12일 정조는 이문원에서 1차, 2차, 3차 국제의 답안지를 직접 채점하여 첫 번째 국제에서 1등으로 뽑힌 생원 윤행경尹行慶에게 『규장전운奎章全韻』 한 건을 상으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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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성균관의 유생이다. 글을 읽어 들은 것이 많으니 어찌 나이가 적은 사학四學의 유생들과 비교하겠는가. 예로부터 임금이 시험 제목을 낸 과거에 백지 답안지를 내놓은 일을 그대들은 일찍이 들어 보았는가. 더구나 게시揭示한 제목이 알기 어려운 것도 아닌 바, 많은 선비들이 경솔하고 거친 것은 바로 나의 수치이니, 이것이 초기草記를 되돌려 주면서 그대들에게 특별히 유시諭示하는 까닭이다.
일찍이 들으니, “촉蜀은 사기祠器이다.” 하였는데, 인군人君이 사기를 조심스럽게 수호하면서 예의로 군신群臣과 백관을 거느린다면, 비록 조용히 팔짱을 끼고 말을 하지 않더라도 묘당廟堂에서의 정치가 저절로 가다듬어지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되어 그 덕德이 감화를 입히고 교육이 시행되어 감응이 밖으로 드러난 것은, 기러기와 고니는 아름답고 백성들은 읊조리며 노래하고 감탄하며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다.
이르기를, “촉을 안고 말을 하지 않아도 묘당이 이미 가다듬어지고 기러기와 고니는 아름답고 백성들은 노래를 부른다[抱蜀不言 廟堂旣修 鴻鵠鏘鏘 維民歌之].”고 하였는데, 이것은 관자管子의 말이다. 내가 매번 이 말을 세 번씩 되풀이하여 왼다. 그러다가 마침 국제菊製로 인하여 기러기 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서 붓 가는 대로 써서 내려 보낸다.
그대들이 그처럼 고집이 세고 문견이 좁은 줄을 일찌감치 알았다면, 알기 쉽고 어렵지 않은 구절의 말을 무엇때문에 아끼고서 게시揭示하지 않았겠는가. 그대들을 지나치게 믿어 반드시 이해하리라 여겨서 어제 고심한 뒤에 이렇게 긴절하지 못한 수응酬應을 하게 되었으니, 매우 한탄스럽다.
율시律詩나 부賦를 지어서 올리는 것은 밤이 깊으면 더욱 운치가 있으니, 과부科賦(과거 볼 때 짓는 부)나 근체近體로 응시하여 결점을 가리도록 하라. 이렇게 구차스러운 일을 행하니, 일의 체모가 극도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3일의 기한을 주니 그 내려 준 제목에 따라 지어 올려서 오늘의 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하고 오늘의 수치를 조금이라도 씻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