嶠南賓興錄
1792년(정조 16), 1책, 목판본, 32.2×20.0cm, K4-5773
1792년(정조 16) 3월 정조가 각신 이만수李晩秀에게 영남 유생을 응제應製로 시험하게 하고, 친히 채점하여 뽑은 합격자 방목과 모범 답안을 묶어 편찬한 책이다. 유생 시험은 주로 성균관에서 시행되지만 지방 유생을 격려하기 위해서 간혹 지방에서도 치러졌다. 특히 정조는 직접 출제한 시제를 각 지방에 보내 시험을 치르게 하고, 손수 답안을 채점하여 유생들을 격려하였다.
정조는 1792년 영남의 선현先賢 이황, 이언적을 배향한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에 치제하고, 유생에게 시험을 치르게 했다. 남인 선현에 대한 치제와 영남 유생에 대한 응제 소식은 영남 유생을 크게 감동시켰다. 이때의 응시 유생은 식년시 응시 인원의 배가 넘는 7,228명이었고, 그 가운데 3,632명이 답안을 제출하였다. 정조는 이만수가 가져온 답안을 채점해서 30명을 선발하고, 그중 유학 강세백姜世白과 생원 김희락金熙洛에게 직부전시를 하사하였다.
정조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하여 감영에 합격자를 불러 후히 대접하고, 시권을 나누어 주게 하였다. 또한 전교, 치제문, 각신과 차비관의 좌목座目, 합격자 방목, 응시 인원, 거둔 시권 수, 우수 시권 4장은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의 범례에 따라 책자로 만들어 간행하게 하였다. 영남 유생의 시험을 전례로 삼아, 1794년(정조 18)에는 관동·제주 유생, 1795년(정조 19)에는 함경도 유생, 1800년(정조 24)에는 관북·관서 유생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