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모당은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설치된 곳으로, 조선 왕조의 어제와 어필 등을 봉장奉藏하던 대표적 존각尊閣이다.
조선시대 왕실 자료를 수합하고 정리하려는 시도는 숙종 대부터 비롯되었다. 1680년(숙종 6) 숙종은 왕실의 족보를 봉안하는 선원각璿源閣을 세워 보첩과 태조부터 선조까지의 어제류를 보관하였다. 1776년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을 건설하면서 그 부속 건물로 봉모당奉謨堂을 지었다. 이는 북송 대 황제나 국왕의 물품을 보관하던 관각館閣 제도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규장각의 초기 이름은 어제각御製閣이었으며, 규장각의 부속 건물에는 봉모당을 비롯해 주합루宙合樓,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 이안각移安閣, 서고西庫 등이 있었다. 그중 봉모당은 기존에 있던 열무정閱武亭의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중앙 한 칸, 곁에 협실夾室과 감탑龕榻을 마련한 협소한 건물이었다. 봉모당에는 역대 국왕의 어제, 어필, 어화御畫, 고명顧命, 유고遺誥, 선원보璿源譜, 선원세보璿源世譜, 국조보감國朝寶鑑, 열성지장列聖誌狀 등을 보관하였다.
봉모당에 봉안된 선왕의 유품은 국왕과 왕세자가 정기적으로 봉심奉審하며 관리하였다. 정조는 매년 초봄과 초가을에 왕세자와 함께 봉모당을 둘러보았고, 매월 두 차례 규장각 각신 2인을 파견하여 봉심하게 하였다.
봉모당은 1857년(철종 8) 1월에 규장각의 이문원 북쪽에 있던 대유재大酉齋로 이전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자 봉모당을 종친부에 소속시켰고, 경복궁으로 천궁할 때 봉모당 자료는 경복궁의 건춘문 밖에 세운 종친부로 옮겨졌다. 1884년 갑오개혁의 직제개편에 따라 규장각이 규장원으로 개칭되면서 궁내부에 소속되었으며, 종친부에서 관장하던 업무가 다시 규장원으로 환원되었다. 광복 이후 봉모당 소장 자료의 대부분은 1981년 문화재관리국에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으로 이관되었고,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경천敬天’을 조리條理의 시작으로 삼고, ‘근학勤學’을 조리의 끝맺음으로 삼으니, 아, ‘경천’이 학문이 아니면 하늘을 제대로 공경할 수 없고, ‘법조法祖’가 학문이 아니면 선조를 제대로 본받을 수 없고, ‘돈친惇親’이 학문이 아니면 친족을 제대로 도타이 할 수 없고, ‘애민愛民’이 학문이 아니면 백성을 제대로 사랑할 수 없고, ‘거당祛黨’이 학문이 아니면 당파를 제대로 제거할 수 없고, ‘숭검崇儉’이 학문이 아니면 검소함을 제대로 높일 수 없고, ‘여정勵精’이 학문이 아니면 정신을 제대로 가다듬을 수 없다. - 『어제상훈』의 근학勤學 -
유교의 정치사상은 국왕에게 성인의 경지에 이르는 개인적 수양과 실천을 요구한다. 요순堯舜이나 공자와 같은 성인의 경지까지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와 비슷한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국왕에게는 거의 무한한 권력과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왕조 시대의 국왕은 모든 백성들이 받들어 모시는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다. 국왕은 신하들을 뽑아서 그 일을 시키지만, 원칙상 최종의 결정권은 국왕이 가진다. 그러므로 국왕은 사대부 선비들보다 더 혹독한 공부와 수양을 지속해야만 했다.
조선은 문文의 나라였고, 백성을 다스리는 통치 세력은 매우 고급의 학문적 소양을 갖추어야 했으며, 무관직武官職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들을 통제하고 이끌고 나아갈 최고지도자인 국왕은 단지 훌륭한 인격을 수양하는 것만으로 부족하여, 학문을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했다. 박학博學하고 세련된 고급 학문의 자유로운 구사 없이는 사대부들을 리드할 수도 문명의 비전을 제시하기도 어려웠다. 일신의 수덕修德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치국治國의 가장 기본적인 수단을 완전히 체화體化하기 위해서 국왕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학문에 정진精進했으며, 심지어 영조는 77세 때 『대학』을 다시 외기도 했다.
편당을 지어 치우치지 않는 것은 『서경』 홍범에 실려 있는 것이고, 원만하게 하고 편벽되지 않는 것은 공자의 교훈으로 밝게 빛난다. 아! 저 편당하는 습관은 어느 때에 일어난 것인가? 삼대三代에는 없었던 것이고, 한漢·당唐의 잘못된 관습이다. 이러하니 이미 자주 신칙하고 격려하여 상세하게 타일렀는데 지금 어찌 다시 편당을 짓겠는가! - 『어제상훈』의 거당祛黨 -
영조는 『어제상훈』에서 어진 이와 능력이 뛰어난 이에게 직위와 직책을 맡기는 문제를 논하기에 앞서 인재들을 두루 선발하고 직임을 맡겨서 편당하지 않게 하는 데에 큰 관심을 두었다. 그는 선왕 때부터 어질고 능력이 뛰어난 신료들이 조정에 있는데,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선대의 업적을 이어 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어진 이를 등용하더라도 파당을 짓는 일에 골몰한다면 국정이 허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영조는 조정의 신료가 조화롭게 화합해야 한다고 강조한 후에, 조선 국왕의 국정 운영에 골격이 되는 ‘어진 이를 등용하라.’는 사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내 이에 간절하게도 남은 뜻이 있으니, 조화롭게 해야 할 도리로 하나는 어진 이에게 맡기는 것이요, 하나는 능력이 뛰어난 이를 쓰는 것이다. 만일 어진 이가 지위[位]에 있으며, 능력이 뛰어난 이가 직책[職]에 있으면,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할 수 있다. - 『어제상훈』의 거당祛黨 -
국왕이 나라를 경영하는 데는 더불어 할 인재가 필요하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잘 정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국왕은 어리석거나 현명하기도 하며, 강직하거나 유약하기도 하다. 국왕의 자질이 한결같을 수 없으므로 이를 보좌할 인재가 필요하다. 국왕이 자신을 보좌할 인재를 잘 선정한다면, 그들은 국왕의 장점은 따르고 잘못된 점은 바로잡아 주면서 국왕이 옳은 길을 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 성리학의 정치사상이다.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나라였다. 인재 등용은 국왕의 어진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국초에 이미 과거와 천거라는 인재 등용의 길을 열어 두었고, 한편으로는 인재 양성을 목표로 관학을 육성하는 데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조선의 국왕들은 유학적 정치를 자신이 이루어야 할 이상적 정치로 인식하였다.
국초 태종은 과거제를 쇄신하여 고려의 유습을 제거해 나갔다. 좌주문생제座主門生制를 혁파하고, 무과를 실시하는 등 조선다운 인재 선발 체제를 갖추었다. 그뿐만 아니라 문관과 무관이 관직에 나아가서도 학업에 관심을 갖도록 독려하기 위해서 중시重試를 시행하였고, 특별한 경우 국왕의 명령으로 비정기 과거를 시행할 수 있는 통로도 만들어 두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6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인재를 천거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였다.
태종이 닦은 이와 같은 제도를 기반으로 세종은 인재양성을 위한 관학의 교과목과 학업 방식 그리고 교육 체제 등을 갖추어 갔다. 세종 이후에도 역대 국왕들은 조선 초기에 제도화된 인재 선발과 양성의 방법을 상황과 시대에 맞게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활성화시킬 방법을 강구하였다. 특히 관료 교육에 관심이 깊었던 성종은 전경문신專經文臣을 두어 관직 생활 중에도 경학經學에 치중할 수 있도록 하며, 문관 관료에게 월과月課로 제술을 부과함으로써 유생 교육만이 아니라 관료 교육에도 박차를 가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기조로 독서당이 건립되었다. 관료들은 독서당에서 공부할 수 있는 대상자로 선정되는 것을 명예로 여겼다. 그러나 사림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등장한 선조 대 이후 국왕이 단순히 어진 이를 선발하고 그들에게 직책을 맡기는 것만으로는 국정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특히 과열된 당쟁 속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는 ‘거당祛黨’을 필생의 과업으로 여겼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예부터 현명한 국왕은 이 도道를 알아 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능히 사직社稷을 보전하였다. 용렬한 국왕은 이 도를 몰라 백성을 죽이고 해쳐 백성이 근본이라는 단서를 추락시키고 이전의 잘못을 잇는다. - 『어제상훈』의 애민愛民 -
옛말에 “임금은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다[君猶舟 民猶水].”라고 하였다. 물이 고요해야 배가 안정되듯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엎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배는 늘 물을 두려워하고 경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왕이 늘 백성의 뜻을 파악하고 백성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해 주고자 노력할 때 백성은 비로소 국왕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이상적인 군주는 하늘이 내린다고 생각하였으며, 하늘은 곧 백성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하정상달下情上達’ 즉 백성의 실정이 국왕에게 전달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상적인 군주가 실천해야 할 일이었다. 백성의 뜻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파악하여 그것을 정치에 반영하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받드는 것이라 여겼으므로 군주와 관료, 군주와 백성 사이에는 쌍방통행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소통의 길이 열려 있어야 했고 또 열어 놓고자 했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君以民爲天, 民以食爲天].”라는 말은 나라의 근본이 백성이고, 백성의 안식처를 만들어 주는 것은 농사이며, 풍년이 들 때 비로소 백성은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은 몸소 친경과 친잠을 실천함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와 양잠을 독려할 뿐만 아니라, 가뭄이 들면 비가 오기를 기원하고 흉년이 들면 풍작이 들기를 기원하였다.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잘못으로 자책하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몸소 개척하는 것이야말로 실천하는 임금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는 곧 우리 조정이 전해준 법이라고 생각한 영조는 공자의 가르침 중에 ‘절용애민節用愛民 사민이시使民以時’라는 여덟 글자를 경복전景福殿에 걸어 놓고 가슴깊이 새기고자 하였다. 또한 치국治國의 요도要道로 생각한 것이 바로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며 백성을 부리되 때를 따라서 하라.’는 지침이었다. 특히 절용은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는 덕목이 아니다. 오히려 국왕이 솔선수범하여 씀씀이를 절약하고 검약함을 마음에 두어 절제할 때, 백성을 해치는 정치가 사라지고 나라의 재물이 넉넉해지며 나라 역시 잘 다스려진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국왕이 몸소 애민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줄 때, 백성들 역시 그 모습을 보면서 힘써 일하고 국왕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서로를 연결하는 고리로 작동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애민의 세 가지 키워드인 소통, 권농, 숭검을 다시 몇 가지 사례로 나누어 살펴본다. ‘소통’에서는 국가와 백성의 조화로운 공존과 번영을 위하여 행했던 상언과 격쟁의 사례들과 암행어사 관련 자료를 통해 백성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국왕의 모습을 확인해 본다. ‘권농’은 다시 친경親耕과 친잠親蠶,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로 구분하여, 백성의 안정된 생활을 위한 국왕의 실천을 살펴본다. 끝으로 ‘숭검’에서는 『탁지정례』, 『국혼정례』, 『상방정례』 등의 절용을 위한 정례서의 편찬에 초점을 맞추고, 구체적인 실천 사례를 확인해 본다.
영조는 『어제상훈』의 「법조」에서 군주의 숭고한 인덕과 위대한 업적이 역사에 빛나게 할 핵심은 ‘선왕[祖宗]의 심법心法’을 계승하고, ‘선왕의 정치 교화[政敎]’를 행함에 있음을 밝혔다. 또한 나라의 인심이 날로 박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역대 선왕이 백성을 사랑하는 성덕聖德 및 선정善政을 공경하여 본받을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이에 선조에 대한 계보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유교적 법치국가로 나아가는 기본 원칙을 수립하고, 나아가 백성의 삶을 돌보고 국가를 수호하는 것을 법조 유훈의 핵심으로 삼았다.
법조의 첫 번째는 왕실 조종의 계보학적 성찰이 깃든 ‘선원과 보감’이다. 『선원계보기략』은 조선왕실의 계통과 정통성을 보여 주는 족보로, 1681년(숙종 7) 편찬에 착수하여 지속적으로 중간·보간하여 조정의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조선의 역대 왕들은 국가의 대계와 열성의 선정만을 모아 편찬한 『국조보감』을 교훈 삼고, 그것을 계술繼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세종 연간에는 중국 송나라의 국사원國史院에서 정사실록을 찬진한 후 조종의 유훈을 초록하여 『보훈寶訓』을 편찬했던 사례를 본받아 선대先代의 실록과 함께 보감의 편찬을 처음 기획하였다. 이후 1458년(세조 4) 『사조보감』이 편찬되었고, 1684년(숙종 10) 『선묘보감』의 편찬이 진행되었다. 영조는 1730년(영조 6) 『숙묘보감』을 편찬하였고, 정조는 1782년(정조 6) 기존 편찬된 보감과 함께 역대 『국조보감』을 집대성하였다.
법조의 두 번째는 통치의 기본 원칙을 수립하기 위한 ‘법전과 의례’이다. 조선은 건국부터 통치 이념의 사상적 방향이 유교적 도덕 국가 건립이라는 설정되었음에도 한편에서는 성문법 제도에 의한 법치주의를 내세웠다. 조선시대 법제도의 특징은 원전과 속전 사이에 모순되는 규정이 있을 경우 원전을 본위로 하는 조종성헌祖宗成憲의 원칙을 고수하면서 변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다양한 법해석과 역사적 경험, 판례 등이 법적용에 다양하게 원용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의 국가 의례를 체계화한 국조오례는 『주례』의 오례 체제에 기인하였다. 조선은 국가적 차원에서 의례를 체계적으로 정비·시행하여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불식시키고, 왕권의 강화를 통해 안정된 집권 체제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는 선왕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시대에 맞게 재정비하고자 하였다. 이에 『속대전』부터 『춘관통고』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법전과 전례서가 편찬되었다.
법조의 세 번째는 국가의 영토를 수호하고 백성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관방과 수성’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안정적인 국가 건설을 위해 관방 중심의 방위체제 구축을 지향하였고, 국방 정책에서 도성都城의 방위 역시 전 국토 방위 체제 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한양 도성 방위에 중점을 둔 관방 체제를 새롭게 편성하였다. 우선 조선 전기의 연안 및 연변, 평지 읍성 중심의 소규모 방어 체계를 보완하여 전략적으로 산성을 축조하였다. 광주·수원·강화도·개성부에 성곽을 완비하여 이들 도시가 도성을 외곽에서 호위하는 군사 도시의 역할도 겸하게 하였다. 한편 중원에서 청의 정세가 악화될 경우, 퇴로에 영고탑을 지나는 조선의 북방이 포함될 것이라는 영고탑 회귀설과 1712년(숙종 38) 청과 조선의 백두산 정계定界는 양국 사이 변경 지역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켰고, 이러한 인식은 이 시기 제작된 관방지도에도 잘 반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