蕩平碑
영조가 1742년(영조 18) 3월 26일 탕평에 관한 글을 손수 써서 내린 것을 새겨 성균관 입구 반수교泮水橋 옆에 세운 비문이다. 이날 왕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행하였다. 영조는 영화당暎花堂에서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례에 참여했던 성균관의 장의掌議와 집사執事로 참여했던 유생 등 11명을 만나 노고를 치하하였다.
영조는 성균관 장의 이병승李秉升·홍낙성洪樂性 그리고 작헌례 집사였던 김치인金致仁 등에게 하교하였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강 이렇다. “너희들이 지금은 성균관 유생에 지나지 않지만 훗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갈 사람들이다. 조정의 근본은 성균관에 있는데, 근래의 사풍士風이 편협하여 성균관이 정치적 갈등의 장場이 되었다. 장의와 여러 집사 유생들이 힘쓸 것은 당색을 초월하여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다.”
당시 성균관의 장의와 재임齋任이 당색에 따른 정치적인 입장 차이로 서로 갈등하면서 집사를 선임하는 데 문제를 일으켰다. 영조는 김치인에게 부친인 영의정 김재로도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데 너는 왜 편협하게 구느냐고 책망하였고, 홍낙성에게도 앞으로 왕세자를 모실 사람들인데 이후로는 명심하라고 하면서 아들을 잘못 키운 부친인 승지 홍상한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책망하였다. 그러고는 탕평에 관한 글귀를 직접 써서 장의에게 내리면서 대사성에게 전달하여 성균관 입구인 반수교 옆에 비를 세우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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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두루 친하고 편당偏黨을 짓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요, 편당을 짓고 두루 친하지 않음은 실로 소인배의 사사로운 생각이다.
황조皇朝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15년 임술년(1742, 영조 18) 봄 3월 26일에 손수 써서 반수교泮水橋 곁에 세우도록 명한다. 위 여덟 글자는 공자의 성훈聖訓이요, 아래 열두 글자는 지금 시대를 탄식하고 다음 세상을 권면하는 의미이다.
◈ 사진 3, 4: 탕평비 탑본(蕩平碑搨本), 1742년(영조 18), 2축, 탑본, 앞뒷면 각 155.0×62.0㎝, 수원박물관(한신대학교박물관 기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