御製聞鳴申聞鼓
영조(英祖) 찬, 1775년(영조 51), 1책, 필사본, 31.0×17.7㎝, K4-2195
1775년(영조 51) 4월 영조가 신문고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감회를 적은 시다. 1402년(태종 2) 태종은 백성에게 관청에서 해결해 주지 않는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임금에게 직접 알릴 수 있도록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상언上言이 제도화되자 백성들은 신문고뿐만 아니라, 글을 쓰거나 징을 쳐서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상언의 수단이 다양해지자, 세조는 신문고를 폐지하였다. 성종이 다시 신문고를 설치하였지만, 명종 때 또 폐지되었다.
1771년(영조 47) 영조는 오랫동안 폐지했던 신문고를 창덕궁 진선문, 시어소의 건명문 남쪽 두 곳에 설치하였다. 어제시에 ‘300년 만에 다시 새로 설치했다.’라고 한 것은 신문고를 처음 설치했던 태종 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당시 격쟁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먼저 장杖이나 태笞를 가볍게 때리고 문초하여 진술 내용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영조는 문초하여 진술을 듣는 것은 『경국대전』에 없는 내용이므로 신문고를 친 사람에게 격쟁의 예를 적용하지 말라고 하였다.
상언이나 격쟁은 조선 후기에 더욱 늘어났다. 영조 때에도 수천 건의 상언과 격쟁이 접수되었다. 그럼에도 영조가 또 신문고를 설치한 것은 백성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더 넓히고 싶었던 그의 소망 때문이었다. 영조는 “만민에게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나와 소통하게 하라[令萬民 通下情].”는 것을 명제로 삼아 그의 정사에 반영하려 했다.
≡
「어제御製 신문고申聞鼓 울린 소리를 듣고」
鳴申聞 今初聞
三百年 復新設
八十二 聞此聲
噫此人 必至願
今此聞 豈偶然
才聞聲 聞午鼓
何處聞 賢南廊
鼓已大 聲亦然
嗟國初 建此鼓
令萬民 通下情
신문고를 울리는 소리, 지금 처음 듣는데
삼백 년 만에 다시 새롭게 설치했지.
여든두 살에 이 소리를 들으니
아아! 이 사람은 반드시 지극한 바람이 있겠구나.
지금 이렇게 듣는 것이 어찌 우연이리오.
금방 소리를 들었는데, 또 정오를 알리는 북소리였네.
어디서 들려왔나, 경현당景賢堂 남쪽 복도지.
북이 크고 보니 북소리도 그렇구나.
아아! 이 나라 초창기에 이 북을 세워서는
만백성으로 하여금 아랫사람의 실정을 통하게 했지.
을미년(1775)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