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대왕실록부록』, 1781년(정조 5), 1책, 금속활자본(顯宗實錄字), 50.0×30.7㎝, K2-82
“직금방織錦坊을 영구히 철폐하고 다시는 설치하지 말라.”는 하교가 있었다.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 사치에 있다고 판단한 영조가 내린 특단의 조치였다. 영조는 스스로 사치스러운 풍속을 개혁하기 위해 신료들을 접견할 때 여러 번 빨아서 낡은 의대衣襨를 입고, 오래되어 해진 흑화黑靴를 신었다. 또 신하들이 임금을 뵙고 절을 하는 돗자리가 떨어졌어도 바꾸지 말라고 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사치는 날로 더해 가고 달로 더해 갔다. 서로 경쟁하여 본받을 뿐 아니라 풍속이 되어 “궁중에서 높게 묶은 상투를 좋아하니 사방에서는 한 자나 높이고, 궁중에서 넓은 소매를 좋아하니 사방에서는 한 필의 비단을 다 쓰더라.”라는 옛말을 상기하며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하는 자가 있음을 개탄하고 왕실에서부터 검소함을 실천하고자 했다.
한편 직기織機를 철폐하는 것만으로 사치를 막을 수는 없었다. 특히 중국에서 무역해 오는 채단綵緞이 문제였다. 이익한李翊漢은 “사치의 폐단은 실로 나라를 망치는 단서가 되는데 상방의 직기는 비록 철거했지만 연시燕市의 채단을 금하지 않는다면 칙려飭勵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라고 상소를 올렸다. 또 이저李著도 “직기를 폐지시킨 것은 진실로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인 것입니다만 만일 궁중의 복어服御를 아주 변경시킬 수 없다고 하여 대내로 들여가는 사단紗緞의 수량을 전일보다 감축시키지 않는다면 지부地部에서 이를 사오는 비용이 도리어 직기를 설치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여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결국 왕실에서는 대소 가례 시 사용하던 문단을 국내산 향직으로 바꾸고 관리 및 보관을 보다 충실히 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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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앞서 왕께서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신축년에 저위儲位를 잇고부터 개연慨然하여 거친 베옷을 입고 흰 베로 만든 관冠을 쓰고서 세도世道를 만회하려 하였으나, 근일 이래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삭감하는 것을 정사政事로 삼을 뿐이니, 그 유폐流弊가 장차 사신史臣이 나날이 기록할 것이 없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어찌 내가 전일에 뜻을 세운 것이 잘못이겠는가? 대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은 바로 사치이다. 그러나 사치를 없애고 검약을 숭상하는 것도 오직 임금이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가 아첨을 좋아하면서 뭇 신하를 시켜 충직하라고 한다면 행해질 수 없을 것이고, 내가 비단옷을 입으면서 뭇 신하를 시켜 무명옷을 입게 한다면 또한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그 근원을 바르게 하여 힘을 헤아려 점점 나아가면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달군 돌 위에서 기장을 굽고 돼지고기를 갈라서 먹었어도 귀신을 공경할 수 있었고, 짐승을 날로 먹고 그 피를 마셨어도 존비尊卑를 분변할 수 있었으며, 궁실宮室의 지붕을 띠로 이고 섬돌을 흙으로 만들었어도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칠 수 있었는데, 삼대三代 이후로 인문人文이 번성하고 사치가 번성하였으나 오히려 근세와 같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혼인할 나이가 지나도 혼인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달이 지나도 장사葬事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조상을 제사하되 예禮대로 하지 않는 것도 사치 때문이다. 대저 풀이 쏠리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그림자가 바르면 표준表準을 안다. 그러므로 필서匹庶는 조사朝士를 본뜨고 조사는 귀척貴戚을 본뜨고 귀척은 왕궁王宮을 근본 삼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사치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방尙方의 직금방織錦坊을 이제부터 영구히 철폐하고 다시는 설치하기를 청하지 말라.”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