御製報春日誦聖學輯要先正註自勉書
영조(英祖) 찬, 1773년(영조 49), 1책, 필사본, 28.0×19.0㎝, K4-2423
영조는 옛날부터 검소한 덕을 추앙했으며, 가장 부끄럽게 여긴 것 또한 사치였다. 영조는 어렸을 때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강화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가마 안에서 입었던 관대冠帶가 세조대細絛帶와 립笠이었다. 이때 립에 밀라영자蜜羅纓子를 하고 있었던 것이 부끄러웠다며,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밀라는 밀화蜜花와 비단을 일컫는다. 비단끈은 갓을 고정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사용하지만 패영은 전적으로 장식용이기 때문에 길이가 짧은 것은 턱 바로 아래에 오지만 긴 것은 배 아래까지도 내려온다. 패영은 신분에 제한이 없었으므로 사치하기 좋아하는 남자들의 필수품이었으므로 이를 금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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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御製 보춘일報春日에 『성학집요聖學輯要』의 선정先正의 주註를 암송하고 스스로를 권면하는 서문」
… 아아! 올해 봉안奉安 때문에 행차하여 강화도를 방문했을 때, 교자轎子 속에서 관대冠帶를 입되 세조대細條帶를 차고 초립草笠을 쓰고도 여전히 밀라영자蜜羅纓子를 구하여 갓끈을 붙이는 데 썼다. 옛날 어릴 적에는 대궐 안에서 문단紋緞을 입었으나 마음속으로 늘 부끄러워하였다. 어찌 단지 내 마음만 그랬겠는가. 지난날 선왕의 검소한 덕을 나는 우러러 목격한 적이 있어, 도리어 중년 이후에는 이 일을 더욱 경계한 것이다. 문단紋緞을 금한 것은 곧 나의 고심의 결과이며, 근래에는 또 광직廣織과 능綾을 금지하였다. 아아! 늘그막이 된 이후에 바지는 면주綿紬를 입지 않고 목면木棉을 썼고, 정해년(1767, 영조 43)에 친잠親蠶한 뒤에는 궐 안에서 연이어 양잠을 하였다. 그러므로 근년에 교직된 옷감과 목면을 돌아가며 사용하였고, 비단 바지를 입지 않은 것은 이미 수십 년 되었다. 한나라 문제文帝가 “노인은 비단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아! 나는 팔순인데 비록 비단을 입지 않아도 오히려 춥지 않았다. 근년에는 더욱 심해져 비록 부채가 어찌 옻칠한 승두선僧頭扇뿐이겠는가. 다만 유선油扇만을 쓴다. 그리고 매다는 것을 물어본다면, 녹영鹿纓 한 가지이다.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마음이 뜬구름과 같고 세상일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