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보감』, 정조(正祖) 명찬, 1782년(정조 6), 22책, 목판본, 32.6×21.7㎝, K2-15
1704년(숙종 30)에 가뭄이 심하여 용산강과 저자도에 신하를 보내어 비를 빌었다. 이때 숙종은 기우제에 사용할 제문을 직접 지었다. 용산강과 저자도는 모두 한강에 속하지만 별도의 기우제장이 마련된 곳이다. 이곳은 특히 용신龍神이 사는 곳이라 여겨 용신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숙종의 기우제문은 가뭄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자책하는 군주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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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갑신년 30년 6월.
한강 물이 서쪽으로 흘러 용강龍江이 되었네. 기도하면 응험이 있어 우리나라를 도왔도다. 어찌 오늘날에는 오랫동안 고택膏澤을 내리지 않는가? 하서夏序가 다 끝나려 하는데, 한발이 오히려 심하다. 시내가 마르고 봇도랑이 고갈되어 사방 들에 풀 한 포기 없도다. 농부는 눈물을 흘리며 운경耘耕을 못하여 밤낮으로 당황하니, 금의옥식錦衣玉食인들 어찌 편안하겠는가? 태실太室에 청명請命하고 농단農壇에 띠[茅]를 둘러 신神을 높이지 않은 것이 없는데, 신은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지 않는가? 신이 어찌 불인不仁하겠는가? 내가 실로 죄를 얻었다. 아! 재변을 부른 것은 오로지
못난 나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니, 허물을 뒤좇아 반성함이 열 가지 백 가지뿐이 아니다. 내가 내 죄를 아는데, 감히 벌책罰責을 피하겠는가? 백성들은 무슨 죄가 있어 고통에 대신 걸렸는가? 만약 순월旬月이 지나면 백성들이 장차 남아 있을 것인가? 백성들이 다 죽고 나면 나라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내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신께서 굽어보신다면 어찌 마음에 슬프지 않겠는가? 다시 중재重宰를 보내 경건히 생폐牲幣를 올리오니, 빨리 명명한 도움을 내려 천 리에 한 번 단비를 내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