肇慶壇碑搨本
고종(高宗) 찬, 고종(高宗)․윤용구(尹用求) 서, 1899년(광무 3), (전면) 전체/화면 211.0×88.0cm/ 175.0×76.0cm, (음기) 전체/화면 211.0×89.3cm/ 176.0×76.3cm, K2-5351-1, 2
전주 이씨의 시조를 기리기 위해 1899년(광무 3)에 전주 건지산(乾止山)에 세운 비를 인출하여 족자로 장황하여 만든 탑본이다.
전면은 고종이 ‘大韓/肇慶壇’이라는 글을 전서체로 썼으며, 음기는 고종이 찬하고 윤용구(尹用求)가 글씨를 썼다. 그 내용은 『국조선원보(國朝璿源譜)』에 시조묘가 누락된 일, 건지산에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묘소를 지정하여 조경단을 세우고 수봉관(守奉官) 2명을 둔 일과 번창 기원 등이다.
전면의 ‘大韓/肇慶壇’에서의 단(壇)은 유골이나 묘를 잃어버려 주인공이 그곳에 없는 즉 실전한 묘지의 비석에 붙이는 것이다. 시조 이한의 묘역은 전주 건지산에 있었다고 전해졌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영조 대 건지산에 시조의 사당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영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경기전(慶基殿) 뒤편에 조경묘(肇慶廟)를 건립하였다. 대한제국기에 들어와 고종은 건지산 묘역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곳에 단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묘역이 산실된 경우 단을 세워 기념하였는데 이를 따를 것이다.
『고종실록』을 살펴보면 1899년 1월 25일에 “전주 건지산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며 관리를 두는 등의 문제는 전부 종정원(宗正院)의 의견대로 집행하며 제단 이름은 조경단이라 부르고 수봉관(守奉官) 두 명은 일가 중에서 특별히 둘 것이다. 비석 앞면의 글은 내가 직접 써서 내려 보낼 것이니 뒷면 글은 전 대학사가 바치도록 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본문에 ‘전주는 국가의 풍패지향이다.[全州乃國家豊沛之鄕]’라는 말이 있는데, ‘풍패’란 한나라 고조인 유방이 태어난 고향 지명이다. 이를 빌려 와 전주 역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본향이라는 뜻에서 ‘풍패지향’이라 쓴 것이다.
장서각에는 이 비의 전면과 음기 탑본 각 1점이 소장되어 있다. 탑면에는 오금을 먹였으며, 회장은 미색 미단으로 두르고 상하변아는 청색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막이는 옥으로 마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