御製鍊戎臺蕩春倉
영조(英祖) 찬, 1775년(영조 51), 1첩, 필사본, 31.2×17.7㎝, K4-3669
1775년(영조 51) 늦은 봄에 영조가 연융대鍊戎臺에 대한 기억을 3언체 20구로 지은 어제를 필사한 것이다. 이 어제에서는 숙종 연간부터 본격화된 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주변 외곽 산성의 완비를 통해 수도 방어를 강화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탕춘대蕩春臺는 현재 서울시 종로구 신영동에 있던 돈대 이름으로, 현존하는 탕춘대성은 도성이나 북한산성과 같이 체성과 여장女墻을 쌓았으며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성구城口를 뚫어 놓았다. 1506년(연산군 12) 1월 27일 연산군이 장의문(藏義門, 창의문) 밖 조지서造紙署 터에 이궁離宮을 지으려다가 높은 곳에 돈대를 쌓고 탕춘대라 하였다. 숙종은 탕춘대성 축조에 대한 반대를 물리치고 1718년(숙종 44) 윤8월 26일부터 탕춘대성을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 동안 성 전체의 절반 정도를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이듬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완성하였다. 1754년(영조 30) 총융청을 탕춘대로 옮기고 이름을 연융대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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彰義北 北漢南 昔年見 今復臨
蕩春前 造紙後 年二十 洗草也
已先見 潛邸時 嗣服後 於頃年
宿於此 翌日回 此摠戎 扈都城
八十二 憶兩年 曷勝懷 誠冥然
鍊戎臺 卽蕩春 嗟北漢 同春侍
自西隨 東門回 於其後 踰大成
前南漢 後北漢 南廣州 北楊州
於其南 屬守禦 於其北 屬摠戎
於南北 爲金城 且都城 亦湯池
乙未年暮春癸丑日 自製
창의문 북쪽과 북한산성의 남쪽을 작년에 보고 지금 다시 왔네.
탕춘대 앞과 조지서 뒤에서 나이 20에 세초를 하였네.
이전 잠저 때 먼저 보았고, 왕위를 계승한 후 근년에
여기서 자고 이튿날 둘러보니 이곳 총융청이 도성을 옹위하였네.
82세에 두 일을 생각하니 진실로 아득함을 어찌 가누랴.
연융대는 곧 탕춘대이다. 아 북한산성은 같은 해 봄에
서쪽을 따라 동문을 돌아오니 그 뒤로 높은 고개 펼쳐졌네.
앞에는 남한산성, 뒤에는 북한산성, 남으로 광주, 북으로 양주
그 남을 수어청이 지키고, 북을 총융청이 지키니
남북으로 금성金城이 되고 도성 또한 탕지로다.
을미년(1775년) 3월 6일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