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自身):
원자로 태어나다

숙종은 광해군을 제외하고 중국으로부터 유일하게 왕세자 책봉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 하지만 현종의 장남이자 원자(元子)로서 부여받은 정통성을 기반으로, 대비의 수렴청정(垂簾聽政)과 대신의 원상제(院相制)를 생략하고 곧바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그는 조선 역사상 영조 이외에 가장 긴 재위기간 동안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국정을 운영하면서, 전란 이후 동요된 사회를 수습하고 재정비하였으며, 예송(禮訟) 논쟁으로 실추되었던 조선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부모(父母):
정통성을 부여받다

숙종의 부친인 현종은 효종이 봉림대군(鳳林大君) 시절 청나라의 인질로 있을 때 심양(瀋陽)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사망과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으로 1649년 왕세손(王世孫)이 되었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왕세자로 책봉되는 등 국왕이 되기 위한 정상적인 책봉 절차를 걸쳐 등극하였다. 숙종의 모친인 명성왕후는 1652년 왕세자빈으로 가례를 치르고, 현종의 즉위로 왕비가 되었으며, 숙종이 즉위하면서 대비가 되었다. 이러한 현종과 명성왕후의 순조로운 왕위 계승과 국정 운영은 아들인 숙종에게 강력한 국왕으로의 정통성을 제공하는 기반이 되었다.

비빈(妃嬪):
사랑과 미움이 갈마들다

숙종은 3명의 왕비와 6명의 후궁을 두었다. 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는 천연두로 요절하였다.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仁顯王后)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폐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복위되었다.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는 숙종 붕어 후 왕대비로서 영조의 왕세제 책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경종의 모친 희빈 장씨(禧嬪張氏)는 왕자를 낳으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희빈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를 저주해 사망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사사(賜死)되었다. 영조의 모친인 숙빈 최씨(淑嬪崔氏)는 인현왕후의 복위와 희빈 장씨의 강등·사사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 연령군의 모친 명빈 박씨 등이 있다.

자제(子弟):
전범을 남기다

숙종은 6남 2녀를 두었으나, 모두 조졸하고 경종, 연잉군, 연령군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외동아들로 성장한데다 20대 후반에 처음 득남(得男)의 기쁨을 누린 만큼 평소 후손에 대한 갈망과 가족에 대한 애착이 대단히 컸는데, 특히 자식을 향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숙종은 왕세자 경종에게는 군주로서의 자질과 함양을 기를 수 있도록 다양한 서적과 어제 등을 통해 조언하였다. 그리고 연잉군과 연령군에게는 경종을 보필하고 종친으로서 활약할 수 있도록 왕실 내에서 일정한 관직을 부여하며 꾸준히 훈련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