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에서 연잉군 시절까지
영조는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인시(寅時, 3~5시)에 창덕궁 보경당(寶慶堂) 옆 태화당(泰和堂)에서 태어났다. 생모 숙빈최씨는 출산하기 한 달 전인 8월 12일 거처를 호산청(護産廳)이 설치된 태화당으로 옮겼다. 태실(胎室)은 그해 9월 26일 지금의 충북 청원군으로 정해져 이듬해 정월에 태를 안장하였다.
영조는 숙종의 네 번째 왕자로 아명은 희수(禧壽)였다. 왕자 이희수(李禧壽)는 6세 되던 1699년(숙종 25) 12월 24일 연잉군에 봉해지고 이름을 금(昑)으로 고쳤다. 10세 되는 1703년(숙종 29) 12월 창경궁 요화당(瑤華堂)에서 관례(冠禮)를 치르고 광숙(光叔)이란 자를 받았다. 11세 되는 1704년(숙종 30) 2월 진사 서종제(徐宗悌)의 딸[정성왕후]과 혼인하였다. 혼인 뒤에도 궁궐에 머물다가 19세 되던 1712년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의 사저(私邸:창의궁)로 거처를 옮겼다. 1718년(숙종 44) 3월 9일 생모 숙빈최씨가 이곳에서 돌아가자 친히 상장례(喪葬禮)를 치렀으며 그 과정을 『무술점차일기(戊戌 苫次日記)』로 남겼다.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는 달인 1720년 6월 8일 부왕 숙종이 재위 46년 만에 승하하자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비통함으로 또다시 상복을 입었다.
이 시절 연잉군은 7세에 종친부(宗親府)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지냈으며, 그 뒤 사옹원(司饔院) 도제조, 도총부(都摠府) 도총관(都摠管), 종친부 도제조를 지냈다.
왕세제 책봉에서 즉위까지
1720년 6월 경종이 즉위했으나 병약한데다 후사가 없었다. 이에 노론(老論) 대신은 경종의 아우 연잉군을 후계자로 정하자고 요청했으며, 마침내 1721년 8월 20일 대왕대비 인원왕후(仁元王后)가 언문교서를 내려 연잉군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당시 연잉군은 세제(世弟) 책봉을 극구 사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다음달 9월 6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책봉례를 치렀다. 그 뒤 좌의정 이건명(李健命)이 사신 으로 청에 파견되어 세제 책봉을 알리자 이듬해 1722년(경종 2) 사신 아극돈(阿克敦)이 강희제(康熙帝)의 고명(誥命)을 가져왔다.
책봉 뒤 세제는 서연(書筵:세제 교육)과 각종 행사에 참석했음이 『동궁일기(東宮日記)』 등에 보인다. 당시 그는 『소학』과 『대학』, 『논어』 등의 사서(四書) 및 『강목(綱目)』 등의 역사책을 주로 읽었다. 또 여러 궁중의례에서 임금을 대리하여 삭망(朔望)·속절(俗節) 등 왕실 제사를 주관하였다.
즉위에서 승하까지
1724년 8월 25일 경종이 승하하고 5일 뒤 세제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이에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사신으로 청에 파견되어 국왕 즉위를 알리자 이듬해 정월 태감(太監) 호량보(胡良輔)가 옹정제(雍正帝)의 고명(誥命)을 가져왔다.
재위 초 1728년 3월 영조 즉위에 불만은 품던 이인좌(李麟佐) 등 남인과 소론이 일으킨 반란을 비롯하여 1755년 을해옥사(乙亥獄事:나주벽서사건), 1762년 임오화변(壬午禍變:사도세자 죽음) 등으로 정치적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재위 동안 탕평(蕩平)·균역(均役) 등 여러 개혁 조치를 단행하고 준천(濬川) 등 백성을 위한 사업을 벌이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또한 인사행정에 직접 참여하는 친정(親政)을 펼치고, 대사례(大射禮)나 경복궁 터에서 과거시험을 여는 등 열성조의 유업을 계승하는 여러 행사를 치렀다. 한편 51세인 1744년(영조 20) 4월에는 태조·숙종에 이어 세 번째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