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궁 소생으로
삼종혈맥을 잇다

영조(1694~1776)는 조선 제21대 임금으로 이름은 금(昑),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자성옹(自醒翁)이다. 숙종대왕과 숙빈최씨(淑嬪崔氏) 사이에서 태어나 6세에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고, 11세에 혼인했으며, 19세에 창의궁(彰義宮)으로 출궁하였다. 1721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고, 1724년 경종의 승하로 국왕에 즉위하여 재위 52년째 되는 1776년 83세로 경희궁에서 승하하였다.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의 소생이자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즉위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720년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 세력은 후사가 없는 경종의 후계자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다. 하지만 서출이자 방계라는 연잉군의 정통성에 큰 한계가 있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왕대비였던 인원왕후(仁元王后)는 언문교서(諺文敎書)를 내려 ‘효종의 혈맥과 숙종의 골육으로 경종과 연잉군만이 있음’을 거론하며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이 ‘삼종혈맥’ 논리는 이후에도 영조의 정통성을 보장해 주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였다.

52년을
국정 쇄신에 힘쓰다

영조는 31살에 즉위하여 83세로 승하할 때까지 조선의 역대 임금 중에 가장 오래 52년간 재위하면서 여러 방면에 치적을 남겼다. 영조의 재위기간에도 여느 임금에 못지않은 많은 사건이 일어났고 변화가 진행되었다.


먼저 조선초의 법전 『경국대전』을 당시의 실정에 맞게 『속대전(續大典)』으로 증보하였다. 국가 의례를 정비 하여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펴내고, 건실한 왕실 재정을 위해 『탁지정례(度支定例)』 등을 편찬하였다.


영조는 팔순이 되던 1773년 자신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탕평·군역·준천·복고·서중·작정을 들었다. 특히 탕평(蕩平)을 통해 당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시켜 정국을 안정시키고 여러 개혁을 추진해갔다. 1751년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하여 양인의 군포(軍布) 부담을 덜어주었고, 1760년 청계천을 준설하여 서민의 거주환경을 개선시켰다.


이밖에 인권에도 깊은 관심을 두어 사형수에게 세 번의 심리를 거치게 하고 비인도적 가혹한 형벌을 모두 없앴다. 1771년에는 신문고(申聞鼓)를 재설치하여 백성의 억울함과 고충을 들으려 하였다. 또 1772년 첩의 자식에게 요직을 허용하는 서얼통청(庶孼通淸)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글로 성찰하고 소통하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조선왕조에서 국왕의 글은 단순한 문예 차원을 넘어 중요한 통치수단이자 소통의 방편이었다. 조선시대 국왕은 어제와 어필을 통해 자신의 사유와 감정을 표현할 뿐 아니라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나라 경영의 철학과 방도를 제시하였다.


영조는 조선 국왕 가운데 누구보다 많은 어제를 남긴 인물로서 이를 통해 선조의 뜻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신하와 백성들을 굽어살피려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뜻은 계술(繼述)과 성찰, 소통으로 요약된다.


영조의 어제 시문은 『열성어제』, 『영종대왕어제속편』, 『영종대왕어제습유』, 『어제집경당편집』, 『어제속집경당편집』 등으로 편차되어 전한다. 이와 함께 장서각에는 영조 노년기에 지은 시문을 첩장이나 간본 형태로 만든 영조어제첩류 5천여 건이 소장 되어 있다. 이들 어제에는 서발문, 제문, 묘지문, 축문, 유서(諭書)와 같이 공적 성격을 지닌 글과 기회(記懷), 자성록, 추모록처럼 사적 성격을 지닌 글이 고루 수록되어 있다. 또한 장서각에는 영조가 직접 쓴 왕실 인사의 비문과 묘지, 제문 등을 비롯해 조정 신하들에게 반포한 영조의 어필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이 외에도 영조 대에는 조선 왕실의 종통을 잇고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국조보감』, 『속광국지경록』 같은 서적이 편찬되었는데, 이 또한 계술과 소통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